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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는 불타지 않았습니다 - <거장과 마르가리타>

이 글 이후로 현실과 허구의 관계에 대한 내용은 다시 쓰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생각한 양자의 관계는 작품 내에서 그리는 현실과 그 안에서 허구로 취급되는 것들의 관계가 중심이었고 작품 바깥의 현실과는 크게 연관짓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에서 볼 때는 작품 자체가 허구다. 거의 20년 만에 다시 읽은 이 책은 이런 이중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줬다. 

 어릴 때 뜻도 모르고 외우던 사도신경에는 어린 나에게도 이상한 구절이 있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예수가 고난을 받기까지의 과정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관계되는데 내 생각에 그 주체는 본디오 빌라도가 아니었다. 내 생각엔 하나님이 고난을 준 것 같고, 그게 아니더라도 예수가 타도하고자 했던 기득권들이나 배신자 유다가 실질적인 고난의 책임자가 아닌가 싶은데 사도신경에서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그 책임을 묻고 있다. 처형을 선고했다는 이유만으로. 
 나치 전범 재판을 보면 잘 알 수 있지만 체제에 의한 악행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악의로 점철된 것이 아니다. 최초로 생각을 떠올리거나 명령한 사람 이외에는 자신의 자리에서 정해진 일을 수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게 문제다. 각 개인이 윤리적 판단을 거부하거나 외면할 때 하나의 비윤리적인 결정은 조직 전체를 좌우하게 된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말한 건데, 본디오 빌라도는 약간 다르다. 그는 판단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판단을 밀어부칠 결단을 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2000년 간 고통받게 된다.

 불가꼬프가 비겁함을 제일의 죄악으로 꼽은 건 그가 스탈린 체제의 문인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일제강점기와 군부독재를 겪었으니 잘 알지 않은가. 지주보다 마름을 미워하게 되지. 마름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 없으면 시스템이 돌아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고. 실제 민주화의 많은 부분은 양심을 지킨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불가꼬프가 느끼기에 당시 소비에트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았나보다. 명백하게 사회비판적인 이 책에서 수많은 사회문제와 악덕이 나오는데 불가꼬프가 비겁함을 제일의 죄악으로 꼽은 이유는 바로 이 비겁함이 부조리한 사회를 유지시키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본디오 빌라도에게는 선의가 있었지만 자신이 속한 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용기를 내기 못했기 때문에 예수가 죽은 것처럼. 
 비겁함이라는 가장 큰 잘못을 저지른 빌라도에 대해서는 매우 진지하게 그의 처지와 심리를 묘사하고 있지만 당대의 소비에트를 풍자할 때에는 아주 가차없다. 어떤 잘못을 왜 벌한다는 말도 없이 농락하는데, 물론 지금 우리가 보기에 어리둥절한 거고 불가꼬프가 쓸 당시에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불가꼬프는 많은 분량을 들여 국가의 감시와 폭력, 그에 따라 공포에 길들여서 순응하는 시민, 도덕보다 욕망을 우선시하는 태도, 영혼을 팔아 현실의 안위를 사는 문필가들을 조롱하고 응징한다. 이는 당대 사회를 비판하는 목적과 동시에 현실에서 구현할 수 없는 청산과 정상화를 이루는 대리만족이기도 하다. 여기서부터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을 떼놓고 생각하기가 어려워진다. 소비에트 당국의 인정을 받은 문인들을 집중적으로 비판한 부분부터 시작해서 거장이 놓인 상황이 작가 자신과 지나칠 정도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런 연결고리로 인해 작품은 '모스크바 - 볼란드 일당'과 '현대(작품 집필 당시) - 예루살렘'에 이어'불가꼬프 - 거장과 마르가리타' 라는 다층적 대립 구도를 가지게 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인 "원고를 불타지 않았습니다"로 시작해보자. 작품 초반에 볼란드 교수는 베를리오즈와 베즈돔느이의 대화에 끼어들면서 신의 존재에 대해 논쟁을 한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문인인 둘은 당연히 신은 없으며 성경은 허구고 예수는 존재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절대적 존재가 아닌 인간이 인간을 지배한다고 하는데 당대에 인간을 지배하는 인간은 스탈린이었다.다. 여기까지 들으면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건 당연한 거고 무신론적 사고는 과학적 입장에서 자연스러운 거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게 20세기 초반의 작품이고 여기서의 유신론 무신론의 대립은 작품이 비판하는 것이 공산주의 소비에트라는 걸 생각해볼 때 작품 속에서의 논조는 도덕과 물질에 가깝다. 유신론을 대표하는 볼란드는 물질 앞에서 도덕을 외면하는 자들을 벌하고 다니니까. 그럼 베를리오즈와 베르돔느이는 무엇을 바치고 물질을 얻었나? 당연히 문학을 팔았다. 대표적으로 거장의 작품. 하나님마서 감동시킨 거장의 작품은 출간되지 않은 채로 온갖 비평으로 난도질당한다. 이에 절망한 거장은 자신의 원고를 불에 태우는데 이것을 볼란드가 다시 만들어내면서 하는 대사가 "원고를 불타지 않았습니다"이다. 물질세계의 법칙을 생각하면 원고는 불탔지. 이걸 다시 가져오려면 환상의 세계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볼란드가 가져온 현실을 이기는 환상. 즉, 예술은 현실에 꺾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럼 현실은 어떨까? 불가꼬프는 실제로 이 소설의 원고를 태운 적이 있다. <개의 심장> 이후 소비에트 체제에서 그의 소설은 출간될 수 없었다. 절망한 불가꼬프는 스탈린에게 편지를 썼다. 국외 망명을 허용하든지, 작품 활동을 보장하든지, 아니면 자신을 죽여달라는 편지였다. 피의 통치자지만 가끔 문학가들에게 매우 관대한 스탈린(불가꼬프의 희곡 <투르빈가의 나날들>을 15번이나 보았다)은 어느날 직접 불가꼬프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작품활동을 허용한다고 말하며 자유 의사에 맡기겠지만 가급적 외국으로 가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전했다. 이에 희망을 얻은 불가꼬프는 불태운 작품을 다시 썼다. 그러니까 우리가 읽고 있는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두 번째로 쓴 작품이다. 묘한 점은 직접 전화한 스탈린의 말이 거짓이라는 사실이다. 전화를 걸 때의 스탈린의 진심을 알 수 없지만 스탈린은 불가꼬프의 작품 출간을 끝내 허락하지 않았고(유일하게 <투르빈가의 나날들>의 상연만 허용) 망명 역시 불허했다. 하지만 스탈린의 거짓말, 이 허구야말로 불가꼬프로 하여금 원고를 불타지 않게 했던 마법이었다. 예루살렘의 예수는 뭐 말할 것도 없지. 부활의 대명사 아닌가. 그러니까 예술과 양심을 잃은 현실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타락하는 가운데 불가꼬프의 현실, 거장의 원고, 예수의 부활은 모두 허구가 현실을 구원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그 구원의 매개가 되는 사람도 거장에게는 마르가리타, 불가꼬프에게는 세 번째 부인인 엘레나 세르게예브나인데 이 작품의 첫 번째 레퍼런스가 <파우스트>라는 걸 생각하면 이것도 작가의 의지다. 
 이쯤 되면 스탈린이 왜 볼란드의 모델로 추정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거짓말이 불가꼬프에게는 구원이었으니까. 물론 전화 직후에 일자리도 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조리한 현실의 모스크바를 만든 원흉인 스탈린(물론 공산주의를 도입한 건 스탈린이 아니지만)이 사회를 고발하고 죄인을 벌하는 신의 대리자의 모델이라는 건 너무하지. 작품 막판에 마테오와 볼란드의 대화에서 악에 대한 볼란드의 대답을 보면 불가꼬프는, 착하고 선한 마음이 사회를 구원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악행은 대갚음으로, 선행은 보상으로. 대갚음과 보상은 모스크바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예루살렘은 작가의 연민을 보여준다. 그가 비겁함을 죄악으로 생각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본디오 빌라도에게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그는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거나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았다. 그는 잘못을 저질렀으되 후회했고 허망한 일이었지만 예수에게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 그래서 2000년이나 벌을 받았지만 그것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그가 죽음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곳에서 고통받은 건 구원이 있기 때문이었다. 비겁함에 고통받던 거장이 자유로운 곳으로 가면서 빌라도에게도 구원이 주어졌다. 이것이 무슨 의미냐고 말할 수 있지만, 이것의 현실(모스크바)판은 베즈돔느이다. 현실에 순응하던 그는 볼란드를 만나고 있을 수 없는 일을 목격하고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다. 그가 류힌에게 가한 예술적 비난은 상당히 흥미롭다. 환상을 접한 뒤 현실의 억압을 뚫고 예술가적 양심의 소리를 내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현실을 인식한 그를, 현실은 용인할 수 없다. 외눈박이의 세상에선 양눈박이가 비정상인 법 아닌가. 그렇게 그는 요양 생활을 하고 오랜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광기의 상징인 달, 만월 아래에서 그는 거장에게 제자 칭호를 받고 완전히 차분해진다. 좁은 문을 통과한 것이다. 

 나는 초월적인 존재가 나와서 모든 악을 때려잡고 착한 이에게 상을 주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의 삶을 아는 사람으로써 이건 현실에 절망한 당신의 대리만족 아니냐고 말할 수 없다. 여기에는 또하나의 묘한 부분이 있다. 불가꼬프는 거장의 삶을 개선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에게 주어진 건 되살아난 원고 뿐이다. 마르가리타를 다시 만나긴 하지만 이건 본인이 떠난 것이기도 하고, 다시 만난 뒤의 묘사를 보면 거장이 행복에 겨워하거나 생활에 만족하는 느낌이 없다. 그는 여전히 죽어 있으며 현재의 즐거움보다 과거의 고통에 매여 있다. 정신병원에 갇혔을 때와 똑같은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정말 대리만족을 위한 것이었다면 거장의 소설은 출간되어야 하고 그 소설은 인민들의 넘치는 사랑을 받아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모스크바를 보면 볼란드가 일으킨 소동은 당장 속시원하긴 하지만 사회를 바꾸진 못했다. 몇몇 악인이 벌을 받았을 뿐 여전히 사람들은 똑같이 살고 있다. 부당한 사회상을 용인할 수 없으니 변혁을 말해야 한다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문한 것을 환영한다. 
 거장은 곧 불가꼬프 자신이 생각한 스스로의 모습이다. 거장은 진정한 작가이긴 하지만 훌륭한 인간상은 아니다. 양심이 따라 창작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소비에트 문인들보다 훨씬 낫지만 자신이 본디오 빌라도를 비난한 원칙에 따르면 사람은 용감하게 현실에 맞서야 하는데 거장 스스로도 그런 모습은 없다. 오히려 자신을 사랑하는 마르가리타를 떠나고, 다시 만나고도 냉담하게 대하지. 심지어 현실의 불가꼬프는 같은 작품을 다시 썼는데(이 시점에서 이미 초인이라고 생각한다) 거장은 그런 것도 없었다. 원고는 볼란드가 만들어줬지. 불가꼬프는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 않은 것 같다. 비겁한 것들이 문제고, 사회가 거지같다고 해서 거지같이 구는 인간들도 문제고, 특히 예술가적 양심따위 애저녁에 팔아치운 문인들이 최악이지만 자신 역시 그간의 고통을 보상받아 부귀영화를 누릴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원고가 불타지 않은 건 거장에 대한 보상이라기보다 예술의 불멸성(굳이 따지자면 마르가리타에 대한 보상)이고 거장이 뭘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없는 것 같다. 결말을 몇 번 고친 걸로 아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거장에게 별 거 없다는 건 비슷하다. 자신에게 불어닥친 오욕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냉정할 수 있다는 것, 작품을 자위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 어떻게 보면 자기비하적이기까지 한 작품을 쓰면서도 예술에 대한 의지는 꺾이기 않았다는 사실. 불가꼬프가 두 번이나 쓴 이 소설은 그의 생전에 출간되지 않았다. 소설은 이른바 '책상서랍 속의 소설'로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고 어떤 문학적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 채 '죽은 소설'이 되었으나 흐루시초프의 집권 이후 스탈린 체제에서 금지됐던 수많은 작품들이 해금되면서 비로소 출간되어 '부활'했다. 이런 과정을 알고 나면 '원고는 불타지 않았습니다'를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다. 

by 날아라개고기 | 2021/07/24 22:01 | 감상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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